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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라이프

글의 가치를 높이는 삽화

한빛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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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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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BIT

14,570

제공 : 한빛 네트워크
저자 : Peter Meyers
역자 : 전경원
원문 : Pictures that propel prose

적절한 삽화와 잘 정렬된 독서의 흐름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도움을 준다.

Peter Meyers 이 글은 피터 메이어의 "책의 혁명: 책과 독서 경험의 변화" 프로젝트 중 일부이다. 앞으로 몇 주에 걸쳐 새로운 종류의 책에 게재된 내용을 저자의 동의하에 다룰 계획이다.

글과 그림을 결합하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일까? (인쇄 쪽이건 디지털 쪽이건)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글과 그림을 같은 페이지에 배치하려고 애를 쓴다. "위고 카브레의 발명품"의 저자이자 삽화가인 브라이언 셀즈닉은 그의 책에서 허망할 정도로 간단한 대안을 보여준다. 그는, 기차역에 홀로 사는 사내아이의 매력적이고 독창적인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 책에서 (책을 펼쳤을 때의) 양면 전체에 걸친 삽화를 수백 장씩이나 보여준다. 그러니까, 글이 몇 쪽 나오고, 양면이 모두 삽화로 채워진 쪽들이 나오고, 다음 쪽에 다시 글이 나오는 식이다.

이건 별로 좋지 않은 아이디어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삽화를 보려면 페이지를 이리저리 넘겨야 하니 말이다. 심지어 일부 독자는 삽화를 보지 않고 그냥 건너뛸 수도 있을 것이다. 오라일리 사엔 미안한 소리지만, 이게 바로 요즘 디지털 북에서 항상 벌어지는 일이다. 지금 읽고 있는 글이 다른 쪽의 그림을 참조하고 있어서, 그림을 보려면 쪽을 위아래로 옮겨야 하는 상황은 독자의 이해를 방해하고 독서의 흐름을 흩으려 놓는다.

하지만 셀즈닉은 책 속의 그림에 단지 그의 글이 설명하는 바를 묘사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부여했다. "위고 카브레의 발명품"에서 삽화는, 글로부터 스토리텔링의 바통을 넘겨받아 그림 고유의 방식으로 줄거리를 전개하는 우아한 장치가 된다.

예를 들어, 위고가 수첩을 빼앗아 간 노인을 쫓아가는 일화가 기술된 부분을 보자. 이 부분에서 독자는 수첩을 돌려 달라는 위고와 위고의 간청을 무시하는 노인을 따라 기차역을 떠나 거리로 걸어나오게 된다. 이 장면의 마지막 문단은 오른쪽 페이지의 마지막에 위치하며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뒤꿈치로 딸깍거리며 걷지 마." 노인이 화난 듯, 나지막이 말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선 자신의 모자를 바로 잡았다. "눈이 모든 걸 덮어서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도시 전체가 평화로울 텐데 말이야."
이 문단 다음엔, 노인에게 말을 거는 위고와 함께 도시를 걷는 노인의 모습이 다섯 개의 양면 그림으로 그려진다. 마지막 그림에서 이 둘은 묘지에 들어선다.

Fig1
"위고 카브레의 발명품"에서, 이 삽화 다음에 오는 글은 독자가 그림의 묘지에 관한 정보를 전달 받았다고 가정한다.

글은 다시 바통을 넘겨받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그들은 곧 묘지를 가로질러 허름한 아파트에 도착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겠는가? 삽화는 독자에게 그들이 묘지로 들어섰다는 첫 번째 정보를 준다. 글에서 묘지를 다시 언급했을 땐, 독자가 삽화의 역할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삽화를 줄거리 전개의 일부로 돌림으로써, 셀즈닉은 그의 그림이 소설에 일반적으로 들어가는 보조 역할의 삽화보다 더욱 관심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책의 삽화를 건너뛰어도 되는 "그냥 그림"으로 여기는 독자들은 이야기가 펼쳐지는 방식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알아챌 것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도서는 어떨까? 셀즈닉이 사용한, 인쇄물에 적합한 해결책을 그대로 재현하자는 말은 아니지만, 여기엔 한 가지 특별한 가치를 지닌 교훈이 담겨 있다. 셀즈닉은 다른 종류의 매체를 같은 쪽에 쑤셔 넣지 않고 의도적으로 각자의 페이지로 나눠놓음으로써, 그가 계획했던 대로 "독서의 흐름"을 유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매체와 독자가 상호작용을 하며 독자 스스로 "독서의 흐름"을 정할 수 있는 작품의 시대에 그러한 권위주위적인 권한은 이단이 아닐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특히 소설에선 작가가 독서의 흐름을 조종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독자에게 (이 부분을 읽어야 할까? 이 동영상을 봐야 하나? 또는 그만 읽을까? 와 같은) 선택이라는 책임을 덜어주면, 여러분은 독자에게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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